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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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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사순/학봉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의성
출생시기
1538년(중종 33년)
시대

상세설명

조선 선조 때 명신인 공의 자는 사순, 호는 학봉이오 본관은 의성이다. 1538년(중종 33년)에 나서 1564년(명종 19년) 27세에 사마시에 뽑혔고 1568년(선조 1년)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에 들어갔으며 한림, 삼사, 이랑, 사인, 대사성을 역임하고 호당을 거쳐 부제학을 지냈다. 공이 아우 복일과 함께 도보로 임하현 천전서 도산 퇴계선생께 나아가 인심과 도심의 구별과 선기 옥형의 원리를 배워서 아우와 함께 연구해서 그림을 그리며 몰두하는 것을 퇴계선생은 창밖에서 엿보고 기쁘게 여겼다.

1577년(선조 10년) 공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때 종계의 잘못된 것은 이미 개찬할 것을 허락하였으나 회전이 아직도 옛날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므로 공은 일행과 힘써 예부상서 마공을 움직여 낭중 심현화로 하여금 개찬하게 하였으니 그 뒤에 반포한 회전은 이때 수정한 것이다.

1591년(선조 24년)에는 통신사가 되어 부사로 정사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정사는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나 부사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서 그와 상반되는 의견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이 경상도 우병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대노하여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김성일이 일찍이 왜가 오지 않는다하여 변정이 해이했기 때문에 적변이 생겼으니 내 장차 국문하리라"하고 금부에 명하여 잡아오라 하였다. 이에 우의정 류성룡과 대간이 변호하니 선조는 묻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일사보국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성일이 과연 능히 할수 있을까"하니 류성룡과 최황이 "성일이 평생 마음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뿐이었으니 진충보국 하리라 믿습니다"하고 왕세자 또한 극히 간하니 선조는 노여움이 풀려 선전관을 보내어 용서하게 하고 또 초유사를 제수하니 공이 직산에 이르러 명을 받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공은 초유사로 종군하여 죽산, 합양등지에서 격문을 돌려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순직하였다. 공이 경상 우감사로 봉명한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수고하여 심열이 극히 번거롭더니 마침내 1593년(선조 26년) 4월에 내장에 여기가 끼어 병을 얻은지 10일만에 진주공관에서 졸하니 살길을 바라는 유민들이 서로 붙들고 호곡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어찌 막막하여 우리 부모를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공이 56세에 졸한지 두달째 성이 함락되고 강우가 도륙이 되어 적의 소굴이 되니 식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공의 한번 죽음을 늦추어 주었다면 일이 어찌 여기에 이르리오" 하였다. 여러번 증직을 내려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숙종 기미년에 문충공의 시호가 내렸다. 안동 임천서원에 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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