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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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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궁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김씨는 신라 때에 국성(國姓)이었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고려 태조가 일어나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섬멸하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때 탁월한 재질과 뛰어난 지략으로 약관(弱冠) 15세의 나이에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 원훈(開國元勳)이 되고 마침내 일선 김씨(一善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처음 공이 숭선(崇善-善山의 옛이름)고을 관리가 되어 명성이 높았다. 고려 태조가 본 군에(어성정) 와서 공을 불러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자기의 활의 줌으로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고쳤다.

이존록(彛尊錄)에 의하면, 공이 어릴 때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아무런 까닭을 말한 다음, 그 사람의 목을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관가에 가서 처벌을 자청하니 관에서 가두어 두고 조정에 고(告) 하였다. 조정에서는 어린 몸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음은 장한 일이라 하여 죄를 사해 주었다고 하니 그의 뛰어난 용맹과 효성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공은 사사로운 일보다 국가를 앞세워 당시 관아를 지을 터가 마땅치 않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사는 집을 (현재의 군 청사) 청사로 국가에 바쳤다.

왕건 태조가 팔공산 동오수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敗)한 후 이곳 선산의 냉산에 숭신산성(崇信山城)을 쌓아 견훤과 싸워 크게 이긴 후, 어견평야(고아 앞들)에서 태조왕건의 선봉장이 되어 신검의 후백제 군대와 마지막 결전을 벌여 대승하므로 통일 성업을 완수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공의 덕과 의를 칭송하여 진민사(鎭民祠-비봉산 아래)라 불리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벼슬은 고려 개국 벽상공신 영문하시중 선주백(高麗開國 壁上功臣 領門下侍中 善州伯)을 지냈고, 고려 정종(定宗) 원년(946)에 다시 대승(大承)으로 추봉하고 시호(諡號)를 순충(順忠)이라 하였다.

그 교지(敎旨)는 다음과 같다.
"나라의 국법은 상벌을 가장 중히 여기나니 공이 많은 자는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이를 보답하고 죄를 범한 자는 엄한 법으로 이를 다스린다. 전 시중 선궁(前 侍中 宣弓)은 그의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고 그 충성된 마음은 일찍이 나라를 받들어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도다.
살아서는 나라를 위하여 밝은 정치를 베풀었고 죽은 후는 그 공훈이 더욱 빛나 청사(靑史)에 길이 남는도다. 이제 다시 벼슬과 시호(諡號)를 내리노니 영혼이 있으면 나의 뜻을 알지어다"

공의 위훈에 대한 나라의 보답이 융숭하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문무를 겸전하고 충절을 다한 위인으로 출장입상(出將入相) 하여 어린 나이로 태조를 도와 오백년 왕업의 초석(礎石)을 이루는 데 충성을 다하였다. 구미시 완전동에 유허비와 해평면 금호동 미석산에 묘소와 재사(齋舍) 및 신도비각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성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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