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공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후송재(後松齋)며 본관은 안동이다. 1552년(명종 7년)에 점곡면 사촌동에서 출생, 일찌기 태학에서 수업하였으나 연산 정변을 보고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서 은거 수도하여 도학과 시례(詩禮)로 영남 일대에 명성이 높았던 송은 광수의 증손이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업은 닦았으며 퇴계의 덕을 사모하고 본 받아서 그 도와 학문을 익혔던 것이다. 재예(才藝)와 총명히 과인(過人)하였으나 가훈에 따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후진 양성에만 힘쓰다가 1592년(선조 25년) 국란이 나자 중형 사형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창녕 하와산성서 섶깔고 맹서하되 '피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섶을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라'는 한 싯구를 남기고 대적 분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난 후 고향에 돌아와 계속 후진 장학과 저작에 힘쓰다가 1620년(광해군 12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69였다. 그 후 2백 30여 년이 지난 철종때 영남 우림들이 공의 훈공을 잊지 못하여 사실을 상소하였더니 '도학이 고명하여 다른 사람의 수범됨이 진실하고 충의가 특이하니 그 노적이 높도다'란 전교와 함께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후공재집과 계문예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창의록과 망우당 동고록에 공의 사실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