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자는 문관(文觀), 호는 관재(冠齋), 본관은 경주이니 호연당(浩然堂) 자양(自養)의 7세손이다. 공이 영천군 북안면반정(永川郡北安面泮亭)에서 주부(注簿) 엽(曄)의 아들로 태어나 천자(天姿)가 뛰어나고 민첩함에 경서(經書),역사(歷史)를 널리 읽어서 의리(義理)를 힘썼으며 또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일찍 전시(殿試)에 응하여 을과(乙科)에 뽑혀 예빈시(禮賓侍) 주서(注書)가 되었다.
1592년 선조 임진(宣祖壬辰)에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범(侵犯)함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충의(忠義)로서 보답하지 않으리오하고 드디어 재산을 헤쳐 의병(義兵)을 이르켜 재종형 대해(大海)와 사종숙 연(演)과 아우 홍해(洪海)와 더불어 세력을 합하여 영천복성에 참가하고, 다시 동도(東都) 경주에 달려가서 여러 의장(義將)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맹열하게 싸우다가 뜻밖에 병사(兵使)가 군률(軍律)을 잃음에 적이 승세한지라,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다가 세궁역진하여 순절함에 아들 익이 시체를 찾아와 북안원당 마현대봉등 묘자에 장사하였고 원종2등훈에 기록되어 있다. 묘비문은 소려 장기상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