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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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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행

행언/오류정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1705년
시대

상세설명

자(字)는 행언(行彦)이여 호(號)는 오류정(五柳亭)이니, 김녕 김씨 충의공(忠毅公 白村 金 文起 先生)의 세손이요 김 명익(金 命益)선생의 아들로서 1705년(肅宗 乙酉) 석보면(石保面) 소계동(素溪洞)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 영리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칩 해 계실 때에 약을 다려드리고 구료 함에 대변을 맛보아 가며 증세(症勢)의 경중(輕重)을 가늠하는 지극한 효성이었다. 아버지는 천식병(喘息病)으로 신음하면서 싱싱한 무(菁根)를 먹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제 철이 아니라 품귀하여 구하기 어려우므로 이곳 저곳 울면서 수소문(搜所聞)하여 구하려 하더니 어느 노파가 무를 갖다 주기에 매우 기뻐하여 값을 후히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구하는 것을 내 어찌 값을 받겠는가」하였다.

어느 때는 약을 구하려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다니다가 깊은 밤중에 큰 범이 그를 따라와 깜짝 놀랐으나 해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은 채 험준한 곳에 이르렀을 때에 표범이 그를 해치려고 다가오는 것을 다른 큰 범이 뛰어와 표범을 쫓아버리고 함께 집까지 따라왔다. 그 사실을 아버지께 아뢰니 「너의 효성에 감동한 산군(山君, 범)이 사나운 표범을 쫓아 너의 신명(身命)을 보호해준 것이다」하고 칭찬하였다.

1740년(庚申) 부친상(父親喪)을 당하매 지극히 애통해 하고 50년간을 하루같이 성묘한 효성이었다. 그는 85세 되던 1789년(己酉) 12월 7일 여느 때나 다름없이 가족들과 내빈(來賓)과 더불어 대화(對話)하다가 한낮(正午)에 이르러 창문에 기대어 깜박 졸다가 하는 말이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산더미만큼 큰 백마(白馬)가 와서 기다린다」하고 홀연히 운명하였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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