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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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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배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상산(商山)이 본관으로 상성군(尙城君) 녹(錄)의 맏아들로 1312년(충선왕 4년)에 지금의 문경시 홍덕동에서 태어난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의 이름난 신하이다. 그는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예문검열(禮文檢閱)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추밀원 직학사(樞密院 直學士), 전객부령(典客副令)에 올라 공민(恭愍)을 따라 원(原)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가 되었고 공민이 왕이 되어 돌아오자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서북면 지휘사(指揮使)가 되었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 홍건적(紅巾賊)이 원군(元軍)에 쫓겨 모거경(毛居敬)을 괴수로 약 4만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오자, 도원수 이암(李 )과 같이 김득배는 지휘사로 적을 맞아 싸워 처음에 크게 이겼으나 얼마되지 않아 오히려 패하여 서경(西京 : 평양)을 점령 당하였으나 1360년(공민왕 9년) 정월에 이방실(李芳實)등과 서경을 쳐서 적 2만을 죽이고 적장 심자(沈刺)와 황지선(黃志善)을 잡았으며 나머지 돌아가는 적을 다시 추격하여, 압록강을 거너 도망한 적은 3백명에 불과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년) 10월에 또 홍걱은 반성(潘城), 사유(沙劉), 주원수(朱元帥)등이 10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남침하여 김득배는 이방실과 같이 상원수로 적을 막고 있다가 적이 안주(安州)를 습격함으로써 절령(巒領 : 자비령)에 나가 진을 쳤으나 적이 제밑에 매복을 하여 패하게 되어 적군은 수도 개경(開經)에 육밤함에 공민왕은 복주(지금의 안동)까지 피난하게 되었고 개경은 함락되고 홍건적은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이듬해인 1362년(공민왕 11년)에 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변관으로 김득배, 안 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는 동시에 나머지 적을 요양성까지 따라가 쳐부수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다.
김득배는 이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원공신(定遠功臣)으로 기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의 벼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신 김용(金鏞)의 모함을 받아 득배의 무리가 큰 공을 이루어 왕이 무겁게 여기는 바가 될까 두려워하여 안우의 무리를 시켜 정세운을 죽이고 또 죄를 만들어 풍기에서 죄없이 체포되어 1362년(공민왕 2년)에 죽으니 듣는자 모두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거두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그 뒤 상주 옥성서원(玉成書院)에 봉안하였다.

김득배의 아우인 김선치(金先致)는 유탁(柳濯)을 따라 왜적을 쳐서 수십 명을 죽였고 벼슬을 여러번 옮기어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었다. 공민왕 때에 원수 이암(泥巖)을 따라 적을 쳐서 일등으로 녹공(錄功)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뽑히었다.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하매 여러 장수를 따라 수복(收復)하였고, 여러번 벼슬을 옮기어 밀직부사와 계림 부윤을 거쳐 동지 밀직(同知密直)에 승진하였으며 낙성군(洛城君)에 봉되었다. 또 아우 김득제(金得齊)도 벼슬하여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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