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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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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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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이후

상세설명

매암 김동석(梅岩 金東碩)은 1903년 선산읍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향학열이 높아 일찍이 개화사조에 눈을 뜨고 먼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를 가졌었다. 나라 잃은 압박과 설움속에서 배움과 구국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배워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중등 과정을 마치고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조국광복을 위해 청년운동에 앞장서다가 일본의 탄압에 못이겨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단체인「진우연맹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다가, 고국 땅인 대구로 압송되어 3년간(1926∼1928)의 옥고를 치루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하는 굳은 신념으로 잠자는 향토민을 일깨우고 문맹에서 눈을 뜨게 하기위해「진영학원」을 설립하여 정열을 쏟아 오다가 해방의 기쁨과 함께 1945년10월 장천면민의 협조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오상학원(五常學園)을 설립하였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교훈으로 삼아 "갠 날에는 농사를 짓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어라. 뜻만 있으면 누구나 공부 할수 있다. 중학 교육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과도 같다"고 하시며 가난한 향토민의 향학열을 북돋우어 숨낳은 훌륭한 일꾼을 배출시켰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교육입국(敎育立國)을 강조하고 봉사와 협동으로 애향심을 일깨워 향토개발을 위한 새마을의 꿈을 심어 주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대웅변가이기도 했다. 만년에는 정치에도 뜻을 두어 민주 의정에 나아가 제4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큰 포부를 못다편 채 1966년 6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셨다.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높은 덕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많은 후진들이 뜻을 모아 1975년10월10일 피땀어린 교정 옆에 흉상을 세워 모셨으니 몸은 비록 가셨어도 그 큰 뜻은 영원히 살아 남아 오상학교와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선생의 둘째 아들 김윤환(국회의원)선업을 계승하여 재단 이사장으로 명문교를 이루고져 더욱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 오상재단연혁록·오상35년사, 대구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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