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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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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

학남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관향은 안동(安東)이요 호는 학남(鶴南)이니 눌재공(訥齋公)의 12세손이며 김병도(金炳度)의 외아들로서 입암면(立岩面) 교동(橋洞)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골이 장대(壯大)하고 지조가 강직하였다. 일찍이 유학(儒學)에 전념하더니 국운(國運)이 자꾸 기울어져 감을 염려하면서 후일을 위한 무술 연마에 힘썼다. 1905년 망국적인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떨치고 일어나 동지(同志)들을 일깨우고 각처에 있는 애국인사(愛國人士)들에게 연락하여 그 해 11월 청송군 주왕산 주왕사(周王寺)에 수십 명의 동지들이 모여 왜적에게 대적할 것을 결의하였다.

12월 중순 울진에 있는 불영사(佛影寺)에서 강원도와 경상도의 동지들이 모여 작전 계획을 세운 다음 안동 청송 진보 영양에 격문(檄文)을 날리고 의병(義兵)을 모집하니 한달 남짓한 동안 각 지방에서 모여든 의병이 5백 명에 이르렀다. 이들 의병을 주왕산과 청량산 두 곳에 집결시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술훈련(武術訓練)을 거듭하였다. 이듬해 2월에 영양군 입암면 교동(橋洞)의 본가(本家)에서 의병단(義兵團)의 조직 편성을 마치었는데 이 때에 장군은 오늘 날 전투 사령관에 해당하는 도포장(都砲長)을 수임(受任)하였다. 그 때 함께 중책을 맡은이는 류시연, 신형일, 권대성, 조완이, 이현규였다.

김대규 장군은 직책을 맡은 즉시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싸움을 개시하여 진보, 청송, 영양에서 수많은 왜병을 무찔렀다. 그 해 4월 진보 오누못(池)전투에서 이른바 의병소탕 책임자인 헌병오장(憲兵伍長)무등(武藤)의 부대와 싸울 때는 끝내 청송군 파천면 어천까지 추격하여 무등을 비롯한 왜병 수십 명을 사살(射殺)하여 크게 승전(勝戰)하였다. 이 전투에서 불행히 부하인 조 완이(趙 完伊)등이 전사(戰死)하고 장군은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그 상처를 치료하면서 남은 병력(兵力)을 다시 정비하여 다음달인 5월에 울진 죽변 그리고 멀리 왜관에서 왜병과 접전 격파하였으나 아군(我軍)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 해 8월에 남은 병력을 이끌고 교동 본가로 돌아와서 병력을 보강(補强)하고 장군은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되어 의병들에 대한 무술 교육에 힘쓰던 중에 10월 교동 앞 병옥동에서 왜병과의 전투가 크게 벌어져 수십일간(數十日間) 계속되었다. 이때 긴급히 많은 왜병이 보충되어와 대 공격을 받아 아군(我軍)이 전원 포위되고 말았다. 장군은 한밤중에 전군대(全軍隊)를 병옥동 앞 강물에 들어가게 하였다. 가을철의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가 소리 없이 헤엄쳐 나갔다. 십 오리나 되는 연당동(蓮塘洞)과 대천동(大泉洞)앞에 이동 집결시키니 장군의 명령에 따른 의병 전원이 그 포위망을 벗어났다. 이와 같은 전술(戰術)은 진실로 영웅적인 공적이었다.

이리하여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남은 의병들은 은밀(隱密)한 곳에서 훈련하여 다음해인 1907년 영양에서 1년간 잦은 전투를 하다보니 군병의 수가 적고 무기와 탄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항전(抗戰)하였다. 그 때에 왜적은 김 대규 의병대장을 잡으려고 큼직한 상금과 벼슬을 내거는 한편 자수(自首)와 밀고(密告)를 권하는 방문(榜文)까지 내붙이기도 하였다. 그 해 11월 장군은 입암면 금학동 뒷산인 안동군 임동면 대곡동이 있는 태백산맥과 일월산맥의 준령에서 왜적과 한달 남짓 싸웠으나 적(敵)은 이길 가망이 없게되자 그 30리의 주변 산을 빙 둘러 불을 질러 화공(火攻)으로 아군과 격전하는 가운데 장군은 11월 21일 장렬한 전사를 하였으니 향년 30세라 한창인 청년 장군의 죽음! 너무나 애석하고 통분하여라. 아아! 장렬(壯烈)한 전사. 나라와 겨레 위해 신명(身命)을 불꽃튀기는 단쇠(鐵火)와 같이 삶과 죽음을 초월한 30평생이여.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어 장군의 공적을 기리었으며, 1980년 4월 5일에는 의사 학남 김 대규 장군묘비(義士 鶴南 金 大圭 將軍墓碑)가 건립(建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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