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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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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김해
출생시기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조선 성종(成宗), 명종(明宗)대의 문신이고 명유(名儒)로 자는 천우(千佑)요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제학(提學) 김준손(金駿孫)선생의 아들로서 탁영 김일손(濯영 金馹孫)선생의 조카이며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선생의 문인이다.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숙부 탁영 김일손선생은 처형 되고 선생은 아버지인 동창 김준손(東窓 金순孫)선생과 같이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년)에 중종반정으로 은사를 받아 적소에서 풀려 나왔다. 1507년(중종 2년)에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고향에 돌아와 은거중 중종(中宗)이 전국에서 행실이 올바르고 참신한 인재를 구하였는데 향리에서 선생을 제일로 밀어서 천거되어 전생서 직장을 지내다가 1519년(중종 14년)에 현량과(賢良科)의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오르고 호조좌랑(戶曺佐郞)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칠원현감(漆原縣監)이 되어 석달 만에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신명(神明)처럼 여겼다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현량과(賢良科)가 폐지되고 급제한 사람들의 발표를 취소하자 직을 사임하고 청도 운문산하에 은거하여 유연자적 벗들과 학문을 논하고 수렵을 즐겼으나 잡은 것은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한다. 1520년(중종15년)에 벗 소요당 박하담(逍遙當朴河淡)선생과 더불어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창설하여 휼민사업을 이끌었다. 선생은 또한 자호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했는데 그뜻은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며 음아(吟我:시를 소리 높이 읊음)에 족(足)이라 하여 삼족(三足)이라 하였다 한다.

1545년(인종 1년) 인종(仁宗) 유명(遺命)으로 복과된 소식을 듣고 상경 도중에 병이 나서 고향에 뒤돌아와서 다시 은거하며 소요당 박하담선생과 같이 객관(객館)을 중창하는 등 고을을 위한 일에 앞장 서는 한편 전국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며 후학들의 계도에 진력하다 1552년(명종 7년)2월에 졸하니 향년 74세 이었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도주지, 도주문화, 오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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