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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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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득(金南得)

충익(忠翊)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고려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남득(南得)이요 초휘는 기지(麒芝)이고 자는 중서(重瑞)이며 시호는 충익(忠翊)이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제5자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11세손이며 후의성군(後義城君) 김용비(金龍庇)의 장손이며 김의(金宜)의 큰아들이다.

선생은 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년)에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집의(監察執義)가 되고 공민왕(恭愍王)때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문하평리(判開城府事門下評理)가 되었다.

1364년(고려 공민왕 13년)에 원제(元帝)가 최유(崔濡)의 농간에 속아 왕을 폐하고자 어사(御史) 유린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할 때 선생이 접반시랑(接伴侍郞)이 되어 무고임을 역설하였던 바 원제(元帝)가 크게 감회하여 계속 재위케 했다.

선생이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 금자광록대부 예부상서(金紫光祿大夫 禮部尙書)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 고양부원군(翊戴功臣 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남득(南得)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남득의 뜻은 영남(嶺南)에서 왕의 뜻에 맞는 인재를 얻었다는 것이다. 시호는 충익(忠翊)으로 내리고 후손들은 선생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본관은 고령으로 하였는데 고양(高陽)은 고령(高靈)의 고호이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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