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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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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엽

이회/죽일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순천
출생시기
1561년
시대

상세설명

상주군 외동면에서 태어나고 예천군 북부 지방 은풍(殷豊) 일대의 문화를 개척한 선구자로 자는 이회(而晦), 호는 죽일재(竹日齋), 본관은 순천인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여섯 살에 이미 효경(孝經)을 읽고 여덟 살에 소학(小學)을, 열 살에는 대학(大學)을 읽으니 향내에 그 소문이 자자했으며 이후로 서울의 할아버지 곁에서 글을 읽다가 열여섯살부터 상주 백원에서 발분망식하고 독서에 열중하니 학업이 대성하여 문장이 뛰어났다.

19세에 주역을 읽고 학문이 성취하고 저술(著述)도 초인적(超人的)이었다. 스물 두 살에 귀허집(歸虛集) 40여권의 저술이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놀랍다(원고가 보관됨) 스물 아홉살인 1589년(선조 22년)에 은풍 취곡(殷豊谷)으로 이사를 와서 예천 북부 지방의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590년(선조 23년)에 생원이 되고 이어 식년문과 을과 제7인으로 급제하고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지금의 상리면 명봉동에 피난시키고 안집사(安集使) 김 백암의 추천으로 풍기현감이 되어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물리쳐 풍기 일대에서는 백성들이 병화를 무사히 면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니 공의 지략과 용기에 모두가 감복 했다.

1595년(선조 28년) 가주서로 입궐(入闕)하여 춘추관 기사관에 이르고 1596년(선조 29년) 승정원 주서에 이어 홍문관 저작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고 주역(周易)을 별전(別殿)에서 시강(侍講)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중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 원익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조부모를 모시기 위해 흥해군수(興海郡守)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다시 1608년(선조 41년)년 홍문관 교리 어사(御史)를 거쳐 1610년(광해 2년)에 정 여창, 조 광조, 이 언적, 이 황, 등 오현(五賢)을 분묘에 배향(配享)하자고 상계(上啓)하여 이를 실행하여 문묘의 제도를 일신시켰으며 상소(上疏)할 때 마다 임금의 비답(批答)을 받아 당세에 명성이 떨쳤으니 이 원익, 이 덕형 두분은 특히 공을 신망하여 정무에 격의 없이 의논했으며 공이 별세하자 상감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리고 온 국민이 애석히 여기더니 1708년(숙종 34년) 사림(士林)이 사현사인 우곡(愚谷)서원을 지금의 하리면 우곡동에 세우고 그 덕을 길이 추모했다.

참고문헌 : 우곡서원봉안문, 순천김씨족보 및 죽일재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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