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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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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곤

자진/검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예안
출생시기
1594년
시대

상세설명

자(字)는 자진, 호는 검암(劒巖) 본관은 예안(禮安)에며 좌승지 득선(得善)의 아들이다. 40에 생원이 되어 성균원생들과 같이 수업했으며 분별이 있고 중후하여 사람들의 많은 칭송을 받았다.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당황하여 피난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나 나 이준, 김 강 등과 더불어 오성위판(五聖位版:대성전에 모셨던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등의 신주로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정신적 기둥)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왕을 따라가 개원사에 봉안 하였다.

환로(宦路)에 뜻이 없던 공은 1648년(인조 26년) 비로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제용감(濟用監)이 되고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사헌부 감찰에 올랐을 때 80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사직하고 낙향했으니 이미 공의 나이도 50을 넘었다. 비록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정성을 다하여 모셨으며 어머니를 모심에 따뜻하고 추운 것이 지나칠까 걱정하여 침소 곁을 떠나지 않으며 매일 저녁 불을 지핌에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몸소 행하였어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항상 부모 앞에서는 즐거운 모습으로 대했으며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에 힘썼다.

1656년(효종 7년) 전적(典籍)에 제수되었으나 노모를 모시기 위해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어머니가 굳이 권하므로 상경하여 뒤미처 병조 좌랑이 되었으나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개포면 경진동에 돌아와 노모를 섬길 때 정성을 다하니 향당이 그의 효도와 우애에 모두 감복했다. 1675년(숙종 1년)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으며 1677년(숙종 3년)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83세의 일기로 숨졌다.

공은 내유외강하고 부지런했으며 조금도 오만하지 않았고 비설(鄙褻)한 말씨를 입에 담지 아니했으며 평생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고 남을 도움에 힘쓰고 사치를 모르며 성품이 대쪽같아서 의리(義利)의 구분과 시비(是非)의 판단이 일검양단(一劒兩斷)하듯 하니 "검암"이란 아호는 비록 그 살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으나 성격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평소에 자손을 훈계하되 부지런히 배우고 착한 것을 좋아하라하고 늘 성현을 스승으로 삼아 교만하지 말며 말을 삼가고 몸을 닦으라 하더니 임종에 앞서 시를 읊어 사십이 넘어 과거하여 공이 없는데 충효를 다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노니 자손들은 내 뜻을 따라 허물없이 살아가라 하니 선비 기질이 이와 같았다.

참고문헌 : 예천군지,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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