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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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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운절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임진란이 끝나고 국력이 소진하고 민생은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1581년, 아포에 살다가 패륜으로 쫓겨나 선사에서 살고 있던 길운절(吉云節) 일당이 반역을 꾀하였다.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사촌 처남되는 익산 출신 소덕유(蘇德裕)가 몸을 피해 중 노릇을 하다 승군(僧軍)이 이끌고 금오산성을 수축하면서 길운절 집에 기숙하고 있으면서 의기 상충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 정여립의 모반 실패는 교통이 사통되는 넓은 곳이었음을 감안하여 제주도를 택했다. 제주도는 목사가 인심을 잃고 있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제주도와 육지에 많은 찬동자를 얻고 군비를 준비하여 이듬 해 6월 6일을 기해 목사 등 관권을 죽이고 제주도를 장악한 다음 서울로 진격한다는 마지막 밀회를 하고 있을 때 기생 구생(具生)이 목사살해 운운하는 말을 엿듣고 길운절을 추궁하니 길운절은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 그길로 목사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일당 20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고, 길운절은 가담은 했지만 변고자는 상준다는 율법으로 몇 달을 두고 어전회의에서 논란을 거듭하다가 처형되었는데 연좌죄(連座罪)만은 면하고 선산부(善山府)는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길운절을 아포에서 쫓아낸 이여림(李汝霖) 등 6명에 대해 양심을 품고 그들을 연좌로 불어 그들은 크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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