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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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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고려 중기에 한 세대를 풍미한 이름난 문신으로서 문하시랑 평장사 영열공(文下侍郞平章事英烈公)인 금의(琴儀) 선생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었으며 6태사(太師)의 한 분인 금종식의 6세 손으로서 1153년(고려 의종 7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는 이름을 극의라고 불렀으며 자는 절지라고 하였다. 선생은 원래 봉화출신이면서 이 시대에 임금으로부터 경기도 금포에 적(籍)을 받았으나 그의 후손은 다시 봉화로 돌아왔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체모(體貌)가 뛰어나고 주견이 뚜렷한 대장부로서 글과 거문고 바둑에 남달리 뛰어났다고 하였으나 큰 그릇은 늦게 차는 법이라는 옛 말과 같이 여러번 과거에 낙방하다가 1184년(명종 14년)에 32세의 몸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이 시대의 고려 사회는 광범위한 지방 토호층을 관리 계급에 흡수하면서 왕의 절대권력을 강화하고 문신만을 우대하다가 무신들의 반발을 산 끝에 정중부의 난을 거쳐서 무신 최충헌이 장기집권을 하던 시기였다.

선생은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살아가면서 당시의 문장가인 이인로, 이규보 등과 교우하면서 실권자 최충헌으로 하여금 문치에 힘쓰도록 하는데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문인학자로서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정성을 드려 많은 명류학자를 골라 숭고한 인격으로 교화하였으며 좋은 인재를 많이 양성하는 한편 사회 신분을 떠나 평민, 향리, 토호층에서 천하의 영재를 선발하였다.

선생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임금에게는 인물의 이롭고 해로운 것을 직접 고하였다. 무인들이 정권을 잡는 일에 좋고 나쁜 것을 임금에게 과감히 진술하였을 뿐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에 스스로 자신의 본분으로 알고 잘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선생의 업적은 공거를 통하여 많은 인재를 고루 기용함으로써 훌륭한 문하생을 많이 거느렸다. 특히 선생이 61세 되던 고려 강종 원년에 북방의 강대 세력이 금나라의 사신이 찾아 왔을 때 우리 나라를 업수이 여기고 임금이 있는 궁궐의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선생이 지혜로써 이를 가로막고 서문으로 들어가게 한 일화가 있다.

지금까지 전하여지는 고려가사 한림별곡에서는 선생을 금학사로 지칭되고 있다. 선생이 66세 되던 1217년(고려 고종 5년)에 태사가 되었으며 또다시 나라의 최고 관직인 판원사에 이르러 고려의 신분사회를 개방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7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백운재가 묘비명을 썼으며 문계서원에서 향사하여 오고 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열전, 신증동국여지승람, 영남여지, 영남군읍지, 한림별곡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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