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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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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

안지/사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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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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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상세설명

1353년(공민왕2)에 안도우군 예안현 북지리에서 부사(府使) 현(顯)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강명(剛明) 청직(淸直)하고 학문이 뛰어나 1386년(우왕12)에 길재(吉再)와 함께 동방(同榜)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고 괴산지군사(槐山知郡事)와 좌사간(左司諫)을 역임했다.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바로 잡고자 권신(權臣)들의 비행을 직간(直諫)하다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출보(出補)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군 임하면 기사리에 은거(隱居)했는데 이태조가 승지(0承旨)로 하여금 누차 소명(召命)하였으나 불응하였고, 태종(太宗)이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등으로 임명했으나 계속 출사(出仕)치 아니하고 스스로 호(號)를 사복재(思復齋)라 하고 반구정(返舊亭)과 봉송대(奉送臺)를 그곳에 소축(所築)하여 고려를 사모하다가 1411년(태종11)59세를 일기로 졸(卒)하였다.

그후 세인(世人)들이 도목촌(桃木村)을 기사리라 불렀고 그 유지(遺趾)에는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고 사림(士林)에서는 영주에 구호서원을 창건하여 향사(享祀)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 훼철(毁撤)되었으며 정자(亭子)들은 후손들이 영주의 구성산에 이건(移建)하여 지금의 명칭인 반구정과 봉송대로 고쳐 불렀으며. 구성산하에 신도비(神道碑)도 건립(建立)하였다. 사복재실기(思復齋實記)와 구호지(鷗湖志)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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