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어려선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고 영리하더니 자라면서 나라를 되찾고자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4기생으로 1920년 2월에 졸업하고 3·1운동 후의 실의에 빠진 국내의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그 해 2월 독립운동 자금과 독립군 모집을 위해 활약하다가 어느 여관에 투숙 중 왜경에 잡힌 바 되니 이것이「무관학교 생도 모집 사건 」이다.
2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여서는 엄시일, 권세형, 권봉 등의 가명을 쓰면서 경향 각지를 돌며 활약하고 안재홍선생이 용문면 성현동 병암정까지 의사를 찾아와 함께 기거하면서 권 봉 이란 별명을 지어 줄 만큼 안 선생과 여운형 선생등과 친했다.
고향에서는 용문사 명봉사가 집회 장소였고 신간회, 교직원 사건, 소작인 사건, 민중소요 사건, 대동국권회복단 사건 등 수많은 항일사건에 늘 선봉을 선 의사는 옥살이, 예비검속, 출감 투옥으로 항일의 일생이 점철되었다. 1930년대 초 예천읍에서 신문지국장을 가장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병 보석되었다가 1936년 39세의 나이로 광복의 영광도 누리지 못한 체 일생을 마친 분이다.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에서 출생하니 자는 도장(道壯), 호는 중산(重山)이며 본관은 예천이요 해진의 아들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졸재(拙齋)의 14대손으로 충절과 문한의 가정에서 태어나 광복 일념으로 민지(民志)를 모았었다. 광복 후 1946년 사회장으로 용문면 덕신동에 안장하였고 1977년 12월 독립유공자로 표창되었고 1979년 용문면 하금곡동 공의 고향마을 앞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 중산 권원하 선생기념 비건립취 지문